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펠리페 2세 (문단 편집) == 개요 == ||[[파일:felifem2.jpg|width=100%]]|| ||<:>'''펠리페 2세의 [[어진|{{{#fff 어진}}}]]'''|| ||[[파일:펠레페제왕의 스페인 제국.png|width=100%]]|| ||<:>'''펠리페 2세가 건설한 [[스페인 제국|{{{#fff 스페인 제국}}}]]([[1598년|{{{#fff 1598년}}}]])'''|| [[스페인 왕국]] [[압스부르고 왕조]]의 제2대 국왕. [[스페인]]에서는 펠리페 2세, [[포르투갈 왕국]]의 왕으로서는 필리프(Filipe) 1세로 불리며 [[잉글랜드 왕국]]에서는 필립 왕[* 잉글랜드 여왕 [[메리 1세]]의 남편으로서 잉글랜드 공동왕이 된 적이 있다.], [[나폴리 왕국]]과 [[시칠리아 왕국]]에서는 필리포 왕[* 여왕인 메리 1세와 결혼하는 김에 아버지로부터 나폴리 왕위와 시칠리아 왕위만 일찍 물려받았다.]으로 불린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의 장남이자 스페인에서의 후계자였던 펠리페 2세는 당시 [[아르마다]]를 투입하여 [[오스만 제국]]과의 [[레판토 해전]]에서의 승리를 필두로 [[포르투갈 왕국]]과의 병합과 나아가 [[아메리카]], [[필리핀]](아예 나라 이름의 유래가 되었다), [[스페인령 네덜란드|네덜란드]], [[밀라노 공국]], [[사르데냐]] 섬, [[시칠리아 왕국]], [[나폴리 왕국]], [[아프리카]] 대륙의 남서부, [[인도]]의 서해안, [[말라카]], [[보르네오 섬]] 등을 접수한 그야말로 '''‘해가 지지 않는 [[스페인 제국]]’'''을 건설한 왕이었다고 평가된다. 즉, 그는 스페인의 최전성기 시절의 군왕으로 스페인의 황금 시대를 상징하는 왕이다. 이 시기 스페인은 [[잉글랜드]], [[프랑스 왕국|프랑스]], [[교황령]] 할 것 없이 모두 그 군대의 깃발과 함대만 보아도 벌벌 떨 만큼의 강대한 국력을 자랑했다. 그 국력을 바탕으로 [[유럽]], [[북아프리카]], [[아메리카]], [[태평양]], [[아시아]]에 걸쳐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유지하였는데[* 사실 이는 아버지 [[카를 5세]]의 제국을 묘사하면서부터 나온 수식어이다.], 이는 [[대영제국]]이 생기기 이전의 일이므로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은 [[스페인 제국]]이 먼저라 할 수 있다. 물론 치세의 명암은 존재하며 누구나 그렇듯 완벽한 군왕은 아니였으나, 이때 확립된 통치체계로 그의 사후에도 스페인은 18세기까지 정체기와 성장기, 실패와 성공을 거치며 강대국으로 유지되었고 특히, 그가 가지고 있던 식민지 영토들은 정체시기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건설되었고 스페인 국운과 함께하였다. 현재에도 스페인의 관광수익과 문화재 중 큰 비중을 자랑하는 건축, 예술이 시대적 조류를 주도하기 시작했던 시절이기도 하다.[* 스페인 자체의 국운과는 별개로 이런 문화적 영향력은 펠리페 사후 오히려 더 꽃을 피워 17세기 중반 [[디에고 벨라스케스]], [[바르톨로메 무리요]], [[프란시스코 데 수르바란]] 시절에 정점을 찍었다.] 전반적으로 [[근대]]적 의미에서 주권 국가와는 거리가 먼 [[중세]] 왕국들인 [[카스티야 연합 왕국]], [[아라곤 왕국]] 등을 카스티야 연합 왕국 중심으로 각종 행정, 정치 개혁과 국가 이데올로기 강화를 통해 독자적인 스페인 국가로 바꾸어 나갔다. 이와중에 아버지 시절 기틀이 잡힌 부왕령 제도나 전문 행정 관료 육성 계획을 통해 스페인의 광대한 영토를 다스리며 유지할 정부 부처 내각 시스템을 마련했으며 대외적으로는 당시 가톨릭 세계 전체를 강타하던 [[트리엔트 공의회]]와 [[종교 개혁#s-3.6|대항종교개혁]]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여기서 나온 개혁을 적극 추진, 가톨릭 세계 전반에서 스페인의 정치, 군사적 영향력 뿐만 아니라 문화 [[이데올로기]]적 [[헤게모니]] 또한 확립했다. 또한 이전까지 이름만 스페인 왕의 땅이고 실질적인 국가 행정력은 거의 닫지 않으며 현지 [[콩키스타도르]] 중심으로 중구난방이었던 아메리카 식민지들을 부왕령과 왕실 재판소(audiencia) 제도로 개편, 이후 아메리카 스페인 식민지 통치의 기틀을 마련했다. 그러나 스페인을 중심으로 한 가톨릭 세계 밖에선 그의 집권기 동안 [[유럽]]의 강국들에게 한껏 질시를 유발해 프랑스 왕국, 잉글랜드 왕국, 프로테스탄트를 받아들인 독일 북부 국가들 같은 개신교권에선 격렬한 증오를 받았다. 특히 네덜란드 반란 과정에서 연이은 정치적 실책은 무려 80년간 스페인을 괴롭히며 결국 스페인령 네덜란드의 반틈과 여기서 나오는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잃었다.[* 저지대 지역에서 거둬들이는 한 해 세금 액수가 스페인이 정복한 영토인 아메리카 대륙에서 캐오는 황금과 은으로 벌어들이는 수익과 맞먹었다. 그런 저지대 지역에서 네덜란드가 독립해 떨어져 나가면서 스페인은 수입에 큰 타격을 입고 커다란 빚을 지게 된다.] 또한 대(對) 잉글랜드 외교에서 실책으로 인해 잉글랜드가 훗날 스페인을 누른 해상 패권국가가 될 계기를 초래하기도 했다. 전반적으로 당시 서유럽 정치 지형 자체를 아예 친(親) 스페인 가톨릭 vs 반(反) 스페인 개신교 진영으로 바꾸면서 이런 갈등의 중심에서 동맹들 만큼이나 적들도 많이 만든 인물이다. 후세의 평가가 갈리는 것처럼, 당시에도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군주로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명군]]과 [[암군]]의 면모를 [[한무제|모두 갖췄다]]는 평가. 현대 영미권의 스페인 사학자들 중심으로[* Geoffrey Parker, J.H, Elliott 등] 전반적으로 내치에선 고평가받으나 외치에선 실패했다는 점에서 미국 대통령 [[린든 B. 존슨]]과 비교되기도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